나는 점점 퇴색하여 흐려지는데. 당신만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것을 꽉 쥐었다. 쥐는 순간에도 그것은 당신이 내게 처음으로 건넸던 호의처럼 부드러웠다.

로그 전문 및 선곡

Commission CREPE의 김아삭 님.

유저 프로필 | CREPE

<aside> <img src="/icons/chat_lightgray.svg" alt="/icons/chat_lightgray.svg" width="40px" /> 프로필과 서사 전달 이후에 자유창작 부탁드린 로그입니다. 함께 추천해주신 시 구절도, 음악도 정말 어울려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소드가 일리치에게 ‘왜 우는거야?’ 하고 물어보지만 같은 질문을 함께 듣는 기분이었습니다.

글 안의 일리치는 결국, 소드에게 안녕이라고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부분이야말로 아주 조금은 소중한 사람의 상실을 견뎌냈다는 의미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일리치가 실제로 그렇게 해낼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요.

정확하게 3년이 지났다는 뜻은 두 사람의 기일이 돌아왔다는 의미입니다. 생일은 모르더라도 기일은 알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셨던게 기억에 남아요. 조만간 같은 시인 분의 시집을 구입해 두어야겠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

</aside>

내가 살아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위 제목은 안지은의 시 ‘생일 축하해’에서 빌려옴.)


그로부터 딱 3년이 지난 오늘에야 결심이 섰다. 그때 못 한 것을 하자고. 내 방 한 켠의 서랍. 서랍에서도 깊이 손을 넣고 오목한 곳을 더듬어야만 닿을 수 있는 곳에. 여태껏 숨겨 온 나의 마지막 채도가 있다. 손을 부드럽게 타고 흐를 듯 걸쳐있는 붉은색을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여전히 도시는 짝이 맞지 않는 다리처럼 삐걱거리고, 나는 점점 퇴색하여 흐려지는데. 당신만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것을 꽉 쥐었다. 쥐는 순간에도 그것은 당신이 내게 처음으로 건넸던 호의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당신을 불렀다. 옆에 당신이 있는 것처럼.

소드 씨, 오늘 저녁에... 음... 사거리에 갈까요?

사거리. 사거리에, 잠봉뵈르 샌드위치가 맛있는 집이 있다고. 어디서 들었어요. 소드 씨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적당히 맛있는 곳을 캐묻느라 깨나 애썼습니다. 하하. 오랜만에 왁스도 좀 바를까요? 저는 머리를 좀 넘겨야 인상이 피던가요? 제가 오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예행 연습을 거쳤는지 아십니까? 그곳에 가는 길은 이제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먹어보진 않았어요. 오늘 처음 먹고 싶었거든요. 어째. 소드 씨의 입맛에 잘 맞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이 더 늦기 전에 얼른 같이 가도록 하죠.

원맨쇼를 하는 만담꾼처럼, 둑을 깨고 터져 나오는 물줄기처럼 말이 흘러 나왔다. ‘진작에’ 같은 말은 소용이 없어진 지 오래였지만. 나는 ‘진작’을 찾을 바엔 ‘이제라도’를 믿는 편이니까. 그새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시 정리하고, 한 줌 쥐어 그것. (아냐. 이젠 뭉뚱그려 퉁치지 않을 것이다.) 리본으로 동여맸다. 아. 정말. 그때 같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니 당연하게도 입김이 나올 만큼 추웠다. 연말이 다가와서 그런가, 거리엔 사람이 많았고. 나는 당신이 발맞춰 올 수 있을 만큼 적당하고도 서정적인 템포로 걸으며 그 잠봉뵈르 집으로 향했다. 근처에서 서성거리기만 해봤지, 직접 들어와 주문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대강 잘 나가는, 맛있는 메뉴가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추천해준 대로 주문했다. 잊지 않고 2인분이다. 얼마간을 기다리자, 음식이 나왔다. 한 접시를 순조롭게 내 앞에 놔둔 종업원은, 나머지 한 접시를 위한 자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앞자리에 놔 주세요. 네. 맛있게 드세요.

소드 씨. 맛있게 드세요.

간단히 인사하고, 나이프를 들어 샌드위치를 천천히 썰어 먹었다. 예상한 대로 아주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적당한 맛이었다. 힘든 업무를 끝내고 먹었다면 이만한 천상의 맛이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내가 열심히 내 몫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내 앞의 또 다른 샌드위치를 건너다보며, 그렇지. 내 것이 아니니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잠시 울고 싶어서 눈가를 비볐다. 그 뒤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져 조금 남은 내 샌드위치를 뒤로 하고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소드의 몫은, 포장을 부탁해 따로 챙겼다. 이제 가야 할 데가 있죠?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가게를 나섰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공동묘지. 묘소 앞에서 팔고 있는 꽃 노점에서 생화와 조화 중에 잠시 고민했다. 나는 붉은 장미 생화를 한 송이 샀다. 친절한 노점 주인은 장미의 가시를 다 다듬어 없애 주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더 좋으련만... 차라리 가시가 가득한 장미를 꼭 쥐고서 다가가고 싶었다. 어떤 이별은 너무 갑작스러워 채 아파하기도 전에 종결되었으니까. 나는 그동안 미뤄온 아픔을 변제해야 했다. 여러 사연과 눈물과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가 같이 묻힌 많은 사람들의 침소에서. 손전등을 켜고 빠르게 훑으며 당신의 이름을 찾았다. 소드. 소드. 벌써 세 번째 오는 것인데도. 찾기가 힘들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당신의 머리맡에 헌화하고 잠깐 묵념했다. 아차. 빼놓을세라, 장미 앞에 포장해온 샌드위치도 놓았다. 아까 먹다 만 것 같길래. 가져왔습니다. 어때요. 맛은 있던가요? 저는 괜찮았는데. 소드 씨는 어떤가요? 하고 싶은 얘기가 더 많은데... 일단 배가 고프지 않습니까.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으면서 들으세요...

그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봐요. 벌써 3년이나 끌어안고 있는 저를. 그래서 말입니다... 저 이제 그만둘 겁니다. 아. 일을 그만둔다는 건 아닙니다. 음... 오랜만에 봐놓고 이런 말부터 하다니 좀 그런가요? 하지만, 이렇게 있는 건. 소드 씨도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래요. 이기적으로 굴어보겠습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겠더군요. 여전히 저는 모자라고, 무르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애를 쓰고요. 늘 피곤합니다. 더 솔직히 말할까요? 이 말도 어딘가 죄스러워서 꺼내질 못했었는데. 이번이 정말로.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보고 싶네요. 당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 하나 없이 당신을 보냈고, 저는 당신의 베일을 헤쳐가며 또 다른 허구의 베일로 한 겹씩 당신을 치장해 왔습니다. 저에게 당신이 너무나도 환상적일 즈음에야 보이더군요. 거기에 한껏 취해 쓰러진 저 자신 말입니다. 그렇죠. 이젠 깨어나야 해요. 그건 소드 씨도 뭣도 아니니까요. 앞으로는 더 바빠질 것 같습니다. 이건... 어떡하면 좋을까요. 음. 당신에게서 당신으로. 그게 맞겠네요. 저는 저 어딘가의 철학과 사상을 맹신하진 않지만. 그래도 다음 기회가 또 있다면. 당신과 함께이기를.

놓아두었던 장미를 들어 리본을 묶어둔 뒤, 도로 내려놓았다. 앞으로 다시 찾을 일은 없겠지. 당신은 나에게 숱한 호의를 주었는데. 내 마지막 인사는 겨우 그거라니. 초라하기 짝이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그렇게 얼마간 공동묘지에 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귀신 들린 사람처럼 실소하니, 견딜 수 없이 피로해졌다. 버스고 뭐고 바퀴 달린 것들이란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그냥 정처 없이 걸었다. 어쩌다 달렸다. 숨이 차서 탁. 멈춰 서기도 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현관문을 열었다. 아. 나는 마저 뭘 할 겨를도 없이 매트리스에 풀썩 쓰러졌다.

당신은 왜. 나를 놓아주질 않아? 이렇게 애타게 해놓고 혼자 가버리려고? 나 이제 진짜 그만 할래요... 너무나도 힘에 부칩니다. 괴로워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소드. 소드. 제가 하려는 말은...

헉. 하고 숨이 멎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당신의 손을 잡았다. 손과 손이 닿자, 당신의 손끝이 화한다. 이내 파스스 흩어진다. 어. 안 되는데. 당신이 옅어진다. 당신이 무어라 말하는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그 말을 영원히 알 수가 없겠지.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이러면 정말 끝내기로 한 내가 뭐가 되냔 말입니다.

눈을 뜨니 커튼 사이로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벌써 한낮인가. 나는 뭘 말하려고 했던 걸까. 입 안이 바싹 말랐고 목도 칼칼했다. 눈가를 만져보니 눈물이 마른 자국. 그렇지. 살아야지. 당분간은, 아니. 아주 오래 내 발로 사거리를 찾는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없었던 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이제 진짜 안녕. 안녕입니다.